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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덜도 말고 개 같았으면…
1960년대 말. 본인을 포함한 동갑내기 친구들이 똥강아지들처럼 온 동네를 누비면서 집 안팎으로 말썽을 부리던 시절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때를 요사이 젊은 친구들은 아마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필자주:아주 오래된 시절을 말할 때는 항상 ‘호랑이 담배’ 문구가 들어가지만 사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이고 5천년 역사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알맞은 인용문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춥고 배고픈 겨울의 추억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고 그중에서도 어른들에게 혼이 나던 개에 관련된 장난은 대충 이렇다.
* 동네 개 괴롭히기 1. 개를 괴롭힐 수 있는 책략과 도망갈 경우 개에게 물리지 않을 주력 등 문무를 겸비한 아이들을 선정한다. 2. 평소 우리들을 물었거나 우리가 괴롭히고 싶은 개를 선정한다. 3. 선정된 개가 지나갈 예상된 골목의 양쪽에 즐비하게 늘어선 쓰레기통(당시는 쓰레기통을 시멘트로 만들어서 골목에 놓아두었으며 크기가 웬만하였다.) 뒤에 숨는다. 4. 목소리가 큰 아이가 시끄러운 깡통으로 개를 몬다. 5. 개는 튄다. 6. 개가 우리들이 원하는 골목으로 접어들으면 양쪽에서 집중 포화를 퍼붓는다. 7. 이것이 압권이다. 겨울에는 당시 100%의 가정이 연탄을 연료로 사용했다. 따라서 쓰레기통 옆에는 사용한 갈색 연탄이 산처럼 쌓여있다. 그 연탄을 양쪽에서 개를 향해 집어던지면 개는 골목 가운데를 폭풍처럼 질주하고 연탄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고, 개는 이리저리 규칙적으로 몸을 돌리면서 뛰는데 요사이 인기 있는 애견스포츠인 어질리티(Agility)의 슬라롬을 통과하는 개보다 훨씬 스펙터클하고 다이내믹한 동작을 선보였다.
※쓰레기통 옆에 숨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1. 개한테 안보이니까 2. 연탄재를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3. 혹시 개가 엉기면 쓰레기통 위로 대피할 수 있으니까
위처럼 개를 괴롭히는데 어른들이 우리를 혼내는 이유는 보통 두 가지이다. “이놈들아! 왜 말 못하는 짐승을 괴롭혀?”가 하나의 이유이고, “야 임마! 청소해놓고 가!”가 두 번째 이유이다. 개가 떠난 자리는 연탄이 땅바닥과 만나서 터진 상처들로 즐비하고, 먼지처럼 부서지는 연탄의 성질 때문에 청소하기도 불편할뿐더러 바람이 불면 연탄재가 날리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의 이유에 대한 본인의 변명은 다음과 같다. “이놈들아! 왜 말 못하는 짐승을 괴롭혀?” 변명1. “말 못하니까 괴롭히죠. 말할 줄 아는 놈들은 괴롭히면 고자질 하거든요?” 변명2. “에이 연탄재 맞아도 하나도 안 아파요. 아저씨도 한번 맞아보시겠어요?” 당시 동네를 돌아다니던 개들은 모두 온몸에 철갑을 두르고 다녔다. 그래서 연탄재 정도는 맞아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는다. 본인이 어린시절 동네를 돌아다니던 개들은 일본 스피츠였거나 중장모의 코트에 체고:체장의 비율이 7:10 정도의 발바리가 대부분이었다. 이 개들은 6개월 전의 초복, 중복, 말복의 전투를 무사히 넘기고 겨울까지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재빠른 순발력과 눈치코치, 우리나라의 한여름 영상 34도 한겨울 영하 20도 50도의 온도 차이가 있는 분명한 사계를 넘기면서 형성된 풍부한 모량, 사람도 먹지 못해 굶는 환경에서 방랑견으로서 살아남은 엄청난 체력을 지닌 상태였다. 거기다 적당히 묻은 묵은때, 적당히 엉겨 붙어 떡처럼 굳은 털로 인해 외피는 말 그대로 철갑처럼 강해서 연탄재 정도 맞아서는 데미지가 없고 오히려 연탄재팩 효과만 생길 정도였다.
그렇다고 개를 이유 없이 괴롭힌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기에 그 당시 본인이 괴롭힌 개들은 모두 고견(故犬)이 되었겠지만 일단 미안한 마음으로 사과한다.
이외에도 쭉 쌓여있는 연탄 밑둥치를 발로 콕 찍어서 전부 쓰러트리기, 초인종(당시는 요비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음) 누르고 도망가기, 널어놓은 누룽지 훔쳐먹기, 쓰레기통 위에서 놀다 부숴놓기, 담벼락 위에 꽂아놓은 병조각 돌로 다져서 편평하게 만들기 등 순진하기도 하고 향토색 농후한 장난으로 어른들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이렇게 혼이 나면 속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아저씨는 꼭 나만 혼내, 내일부터 골목에서 만나도 인사하지 말아야지, 오늘의 수모를 반드시 잊지 않을 거야….” 그러나 나이가 어린 나와 친구들은 우리를 혼냈던 어른을 다시 만나면 ‘나를 혼냈던 아저씨’라고 인식하면서도 자동으로 “아저씨 안녕하세요!”라고 목청껏 인사한다. 이래서 아이들은 순수하고 정직하고 천진난만하다고 하는 것이겠고,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점차로 순수를 잊게 되고 각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이 보편적인 정체성의 변화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순수의 시대!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그 순수의 정체성을 내 옆에서 쉬지 않고 보여주는 대상이 바로 개이다. 물론 개는 동료 개로부터 밥을 뺏어 먹기도 하고, 몰래 사고도 치지만 그러한 생존본능의 표현이 아닌, 우리 애견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개의 주인을 향한 충성과 사랑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개만이 갖고 있는 바로 이러한 정체성이 나의 어린시절이고 내 동료와 아이들이 개가 그랬던 것처럼 내게 그렇게 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의 기원이기도 하다.
오늘 아침 셋째딸을 혼내고 출근했다. 자기 개인형을 넷째가 가지고 논다고 뺏어서 넷째를 울렸고, 셋째에게는 언니들에게 물려받은 공주인형과 궁전세트를 언니들이 도로 가져가라고 하니까 샘이 많은 셋째가 엄청 서글프게 울고 말았다. 그렇지만 잠시 후 집에 들어가면 셋째는 어김없이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라고 소리치며 나를 반기며 안길 것이다. 아침에 혼낸 내가 오히려 무안하게….
이렇게 본인의 개도 개처럼 굴고, 딸도 개 같은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왜 우리만 개 같지 않을까? 과연 개 같지 않다는 것이 현대인들의 자랑일까 아니면 잘못일까? 영원히 식지 않는 사랑과 충직스러운 개가 지닌 신의를 사람들이 지킨다면 이 사회는 더 발전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다시 생각한다. 나의 애견 ‘쏠’처럼, 나의 아이들처럼 나도 그렇게 결코 노여워하지 않고 살고 싶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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